서포터즈 활동

[제1기 서포터즈_김은비 서포터]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줬으면

wheta 2023. 11. 16. 14:34

본 사업은 2023년도 청년들에게 여순사건의 배경과 지역에서 갖는 의미를 알리며, 청년 서포터즈를 양성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여순사건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사업입니다.

여순사건청년서포터즈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

내가 이전까지 알고 있던 여순사건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 정도였다.

그러던 중 친구의 권유로 청년서포터즈를 함께 신청하게 되었고, 발대식 날 담당자분을 통해 한 권의 책을 받았다.

 

<한 풀고 눈 감으면 좋으련만> 순천대학교 10.19연구소 저

 

순천대학교 10.19연구소가 발간한 책자였다.

우리 학교에 여순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연구소가 있는지 이때 처음 알았다.

‘순천에 살면서 나만 너무 무관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원자(1947년생, 74세) 씨의 구술

 

여순10.19가 일어나고 봉기군이 외관으로 빠진 후, 김원자 씨의 아버지 김윤문 씨(당시 24세)는 아래채의 고장 난 대문을 고치러 나갔다가 어디에선가 날아든 유탄에 사망하였다. 회사로 출근한 아들에게 따뜻한 점심을 먹이겠다며 집으로 아들을 불렀던 김원자 씨의 할머니는 그때 문을 고쳐달라고 했던 사람을 평생 원망하면서 사셨다고 한다.

 

 

 

단순히 사건의 표면적인 정의만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유족의 이야기를 날것으로 전해 듣는 것은 많이 달랐다.

 

어느 날, 내 아버지가 ‘어디선가 날아든 유탄에 사망했다.’는 한 줄로 세상에서 지워진다는 건 대체 무슨 기분일까.

어떤 말로도 그 허망함과 슬픔을 모두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냉정하게 말해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미 육신도 영혼도 사라져서 없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 눈물 또한 산 사람이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유족들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털어놓은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 요동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26살인 지금의 나에게 이입해서 보게 된다.

 

어린 딸을 두고 회사에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들렀던 집.

이웃의 부탁으로 고장난 대문을 고치던 순간 날아온 유탄에 죽음을 맞은,

지금의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청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삶이 있었음을 실감하고 나자, 여순사건의 의미가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라이프지에 실린 칼 마이던스 기자의 사진.
동천변에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다.
70년 전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던 동천변 서쪽 제방.

 

 

결국 뭐든지 간에, 사람은 자기 일로 다가와야 허둥지둥 마음이 급해지기 마련이다.

 

사진 속 장소인 동천은 내가 평소 러닝을 즐겨하는 장소이다.

 

엊그제 저녁까지만해도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며 뛰었던 트랙이,

불과 몇십년 전에는 누군가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방치됐었던 곳이라는 사실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 후에 떠오른 것은 한 가지 의문이었다.

이분들은 어쩌다 이런 죽음을 맞았을까.

 

 

여순10·19 당시 호남신문사 부장이었던 고 이경모 기자와 미국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의 사진 속에 널브러진 시신들은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다. 박병섭 순천문화재단 이사는 “시내에 쌓인 시신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동천 강둑에 갖다 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진압군이 반란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사상 검증을 당하고, 좌파로 판정되어 살해당했다.

문제는 혼란한 상황에 이 ‘사상 검증’의 기준은 너무나도 빈약했고,

집행 과정 또한 폭력적이었다는 것이다.

 

 

분류 기준은 40세 이하의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 흰색 일본식 작업화를 신은 자 등이다. 그저 손가락질 한 번에 처형을 당했다고 해서 ‘손가락총’이란 끔찍한 표현도 생겨났다. 손가락총에 지목된 사람들은 북초등학교 인근과 봉화산 죽도봉 골짜기, 순천농림중학교(지금의 순천대학교), 매산중학교 등지에서 집단 사살이 이뤄졌다. 학살은 23일과 24일 이틀간 집중됐다.

 

 

솔직한 심정으로,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정치적인 논쟁이나 구설수는 머리가 아파 되도록 사양하고 싶다.

 

그러니 분명한 사실 하나에만 집중하고 싶다.

 

좌, 우익이 뭔지도 모르고 저쪽 가서 서 있으란 말대로 했다가

수백, 수천명이 죄 없이 죽었다는 것.

 

남은 가족들은 내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조차

신변에 위협이 될까 감히 말조차 쉬이 꺼내어 보지 못한 채

눈물로 긴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 말이다.

 

 

여순사건 특별법이 발의되던 순간

 

2년 전부터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고 있다.

조금이나마 유족들의 합당한 권리 행사와 명예를 회복하는 데 있어 기틀이 세워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흔히 역사란 완벽한 객관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으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지도 않다고 에드워드 카는 주장한다.

 

여순사건 또한 입장에 따라 다른 인식을 갖고,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니 나는 이번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유족들의 입장을 알리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이제껏 주목받지 못했고, 주목받을 수 없었던 그 한이 서린 역사를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줬으면 좋겠다.

 

 

인용한 사진 및 기사 출처:

제주투데이 <여순‘사건’을 여순‘항쟁’으로 갈아 끼우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639 

여수 MBC <여순사건 75주기.. 추모행사 제각각>

https://youtu.be/JkNVTAVEf_A?si=2RAETIxm1G0c3ys-